T1 숙소를 가다
모처럼만에 겨울가뭄을 적시는 단비가 내렸지만 바람을 동반한 비는 행인들의 걸음을 재촉할 정도로 무섭게 쏟아져 내렸다. 악천 후를 뚫고 도착한 곳은 논현동 T1 숙소, 선수들 모두가 연습실로 향하고 텅 빈 그곳에서 오늘의 인터뷰 주인공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매일 얼굴 보는 사이
“인터뷰한다고 해서 일찍 오려고 했는데 장보고 오느라 늦었네.”

부랴부랴 거실로 짐을 옮기며 식사여부를 묻는 그녀는 5년 째 T1 선수들의 식사를 책임지고 계시는 박정숙(57세)여사님. 그녀 뒤를 따라 배달원이 찬거리로 가득한 짐을 바닥에 내려 놓았는데 이날 선수들의 식탁에 오를 음식의 재료들이었다.

때마침 점심시간인지라 본격적인 인터뷰는 식사 후 진행하기로 합의를 보고 그녀의 초대만찬에 응했다. 우렁각시의 손을 빌리기라도 한 듯 금새 차려진 식탁은 평균적으로 집에서 먹는 반찬 수 두 배 이상의 수준이었는데 지포볶음, 나물무침, 호박무침, 생태찌개 등 전형적인 ‘어머니 표’ 음식 중에서도 칼칼하면서도 간이 잘 밴 생태찌개가 일품이었다.
 
“요환이가 와서 숙소 분위기가 훨씬 밝아졌어. 걔는 밥도 얼마나 잘 먹는데. 가리는 것도 없고 끼니 한번 거르는 걸 못 봤어.”

그녀가 먼저 선수들의 이야기로 겸상의 어색함을 깼다.

“난 밥 잘 먹는 애들이 제일 예뻐. 밥을 잘 먹어야 집중도 잘 되거든. 장기전 하는 거 보면 땀을 비오 듯 흘리는 애들도 있는데 그게 다 밥심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니깐.”
그녀에게 사랑 받기 위한 제 1조건은 밥 잘 먹기였고 이것을 잘 실행하고 있는 선수는 최고참 임요환 선수였다.

지난 해 초, T1은 연습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연습실과 숙소의 분리체계를 시행했다. 숙소는 주방을 포함한 6층과 넓은 거실을 겸한 7층으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예전보다 선수들의 수가 늘어난 탓에 빨래와 청소 등 그녀의 힘에 부치는 일들은 선수들의 몫이 되었다. 

 “오혁이가 청소는 제일 잘해. 걔가 6층에 있을 때는 화장실이 깨끗했는데 7층으로 간 후부터 먼지가 조금씩 보이더라고. (웃음) 명훈이는 시키지 않아도 주방 일을 잘 도와줘. 둘이 아주 야무지게 잘 도와.”

청소 잘하는 주장 오혁과 착한 막내 명훈의 이야기에 심취해 있는 도중 한 선수 앞으로 택배가 도착했다. 발렌타인데이를 하루 앞둔 날의 풍경치고는 허전했지만 숙소 곳곳이 이미 팬들의 다양한 선물로 가득한 상태였다.

“선물은 택용이가 제일 많이 받지. 예전에는 요환이가 많이 받았는데 지금은 택용이가 제일 많이 들어와. 명훈이는 과일이 많이 들어오는 편이고 태민이는 떡을 좋아해서 떡이 많이 들어왔었어. 또 성제는 케이크를 자주 받아오더라고.”

선수 기호와 특성을 고려한 맞춤제작용 선물은 바쁜 스케줄로 끼니를 거르기 쉬운 선수들에게는 일상의 달콤함이자 큐피트 간식이기도 했다.

될성부른 나무는 숙소에서부터 알아본다?
점심식사를 마친 그녀는 저녁준비를 위해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그녀를 제일 먼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역시 싱크대 안의 설거지거리였다. 밥값이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도와드린다 했지만 극구 말리는 탓에 하는 수 없이 숙소 곳곳을 스케치하는 것으로 시간을 때웠다.
설거지를 끝낸 그녀는 쉬지 않고 바로 저녁반찬의 재료를 다듬었다. 시금치와 도라지, 깻잎, 파 등의 채소를 능숙하게 손질하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요즘엔 택용이, 오혁이랑 대화를 제일 많이 나눠. 택용이가 처음 숙소 왔을 때는 말도 별로 없고 밥도 잘 안 먹고 그랬는데 적응이 돼서 그런지 많이 변했어. 지난 여름에 아파서 숙소에서 쉬는 시간이 많았는데 그 때 택용이랑 많이 친해졌어. 내가 인규도 참 많이 예뻐하는데 요새 밥을 잘 안 먹어서 걱정이야.”

그녀는 의외의 모습을 가진 선수로 얼마 전 공군에 입대한 박태민과 박재혁 선수를 꼽기도 했다.

“태민이는 얼마나 애교가 많다고. 한번은 식탁에 앉아서 멍하니 있길래 왜 그러냐고 했더니 애교 섞인 목소리로 <졸려>이러더라고. 다른 애들은 안 그러는데 태민이가 꼭 엄마처럼 편하게 대해. 재혁이는 반찬 같은 게 자기 입에 맞으면 <와, 이거 진짜 맛있다. 아까도 먹어봤는데 아줌마가 하는 게 훨씬 맛있다> 하는데 아무튼 음식에 대한 반응은 제일 좋아. 사실 내가 한 음식 맛있게 먹는 것만큼 기분 좋은 게 어디 있겠어. 또 건준이도 의외로 싹싹한 구석이 있어. 숙소에 도착하면서 제일 먼저 큰 소리로 <아줌마~>하고 나부터 찾을 때가 많아.”

2군부터 올드급 선수들까지 그들의 성향과 식성, 그리고 심리까지 줄줄 꾀고 있는 그녀는 선수에 대한 예지력 또한 감독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명훈이는 애가 크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어. 조용하면서도 자기 할 일은 다 해놓는 거 보니까 얜 뭐가 되도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렇게 되더라고. 재욱이는 팀에 오자마자 잘 풀려서 뭐 지켜볼 세도 없었고.”

자식 자랑하는 엄마처럼 그녀의 선수자랑은 끝이 없었다. 열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어른들의 말이 딱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기본 반찬 외에도 생선찜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이날 저녁식탁의 핵심은 주장 권오혁 선수의 생일을 맞아 끓인 미역국이었다.

“작년 달력에는 생일이 표시가 되어있어서 제때 국을 끓여줄 수 있었는데 올핸 체크를 못해서 하마터면 오혁이 생일도 놓칠 뻔 했어. 근데 어느 날 미역국을 끓여야겠다 생각하면 마침 그날이 생일인 사람이 있더라고. 저번에도 홍합살을 넣고 미역국을 끓였는데 그날이 마침 감독님 생일이었던 거지. 운 좋게도 몇 번 그런 적이 있어. (웃음)

운이 좋았다고 말은 하지만 5년 동안 간식 하나를 만들어도 정성을 들이지 않은 적이 없었고 산 김치 한번 식탁에 올린 적이 없는 그녀였다. 이것이 밖에서 먹는 음식이 선수들에게는 숙소의 밥보다 한 수 아래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기도 했다.
체력이 닿는 한 계속 아이들을 챙겨주고 싶은 마음뿐……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인 2004년, 그녀가 급하게 연락을 받고 찾아간 곳에는 반바지 차림의 젊은 남자가 마중 나와 있었는데 그가 주훈 (전 SK 감독) 해설위원이었다.

“그날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 오후 1시쯤 숙소에 도착했는데 이사 당일 날이라서 그런지 집에 아무 것도 없는 거야. 당장 취사도구랑 쌀부터 사야 하는 상황이었어. 한참 정신 없이 준비하고 있는데 키 큰 애가 하나 오더니 <아줌마 우리 점심 저녁 하나도 못 먹었어요. 배 고파요.> 하는데 걔가 연성이었어. 애는 배고프다고 하는데 준비한 건 하나도 없고 그래서 사다 논 줄줄이햄을 먹으라고 줬네. 그 때 어떻게 밥을 해서 줬는지도 모르겠어.”

게임은 물론 프로게이머가 뭔지도 몰랐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5년이 흐르는 동안 그녀는 젊음을 되찾은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전문가 수준은 아니어도 내 또래 아줌마들에 비하면 게임박사가 다 됐지 정말.”

실제로 그녀는 60을 바라보는 나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프로리그는 물론 개인리그 방식과 선수들의 스케줄까지 꿰뚫고 있었다.

“선수들이랑 같이 있으니까 몸도 생각도 젊어지는 것 같아서 좋아.”

젊은 감각을 유지하는 것 외에도 선수들과 생활하는 동안 그녀는 남다른 능력이(?) 생겼다.

“나도 애들처럼 징크스가 있는데 경기가 있는 날 신기하게도 반찬에 따라 애들이 지고 이기고 하더라고. 그래서 경기 있는 날은 일부러 그런 반찬들은 피해서 줘. 그리고 나쁜 꿈을 꾸게 되면 경기결과가 나쁘게 나온 적이 많았어. 그래서 꿈자리가 좋지 않으면 항상 걱정되고 그래.”

한번도 빗나간 적이 없다던 그녀의 예지몽을 선수들도 인정한 듯 개인리그가 있는 날이면 알아서 반찬세팅을 부탁하는 선수들도 있다고 했다.
빗소리는 잦아들었지만 그녀가 주방에서 똑닥대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2시간이 넘는 긴 인터뷰가 끝나는 시점에 이르자 그녀는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들려주었다.

“나는 좀 긍정적인 성격이라 애들한테도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말해줘. 멋진 집을 봐도 나는 언제 저렇게 사나 하고 생각하기 보단 나도 언젠간 저렇게 되겠지 라고 생각하는 게 마음이 더 편하고 좋잖아. 애들이 내가 이렇게 얘기를 했을 때 따라줘서 성적이 좋아지면 내 마음이 좋고 편해져. 애들한테는 잔소리로 들릴 수도 있지만 세월이 흘러서도 애들이 아, 그 때 아줌마가 그런 얘기를 했었지 할 정도만 될 수 있어도 만족해 난.”

선수들이 곧 도착한다는 전화를 받고 일의 속도를 높이는 그녀는 체력이 되는 한 5년이고 10년이고 선수들에게 따듯한 밥을 지어주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화려한 조명과 팬들의 환호성이 넘치는 경기장을 빠져나오면 허무함과 쓸쓸한 마음이 들 때가 많은 선수들이 가족의 품이 아닌 곳에서도 안식을 취할 수 있는 이유는 그녀의 따뜻한 밥상이 지치고 외로운 그들을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때론 선생님처럼 따끔한 충고를, 때론 인생의 선배로서 조언을, 때론 엄마처럼 넓은 품을 내어주는 그녀가 준비한 정성 어린 식탁에 앉아 오늘도 내일도 선수들은 행복한 만찬을 즐기며 제 2의 가족을 만들어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