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수의 눈물 그 후……
2008년 7월 12일, 비가 유난히 많이 내리던 그날 인천 삼산월드 체육관의 괴수도 차창을 흔드는 거센 장맛비처럼 눈물을 쏟아낸다. 반면 투신은 팬들을 향해 골든 마우스를 자랑스럽게 들어 보이며 환희의 순간을 만끽한다. 패자는 잠시 승자에게 무대 중앙을 내주고는 무대 뒤 한 켠에 서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었던 스타리그는 그렇게 투신
결승전이 끝나고 4일 후인 7월 16에 스타리그의 준우승자
“명동은 사람이 워낙 많아서 인터뷰하기에 불편할거예요.”
“괜찮아요. 아무도 못 알아 봐요.”
밖은 여전히 눅눅한 장맛비로 천지가 촉촉히 젖어 있었고 사람들은 복잡한 골목 안에서 우산을 부딪혀가며 퇴근 길을 재촉했다. 장바구니를 들고 엄마의 시장 길을 따라가는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그는 열심히 내 뒤를 따랐다.
소주토스
1. 한 잔 – 아쉬움이 남는 결승전
본격적인 인터뷰를 시작하기 위해 자리를 옮긴 곳은 명동과 을지로를 잇는 작은 골목길에 위치한 호프 집이었다. 조용한 2층으로 자리를 잡은 뒤 여름철 별미인 시원한 화채와 소주 한 병을 주문하고는 그에게 가벼운 질문부터 던졌다.
“술 잘 마신다면서요?”
“아뇨. 잘 못 먹어요.”
“들리는 소문엔 잘 먹는다던데……”
멋쩍은 듯 웃어 보이지만 시선은 늘 그렇듯 먼 산이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그의 시선처리 방식은 그가 아주 수줍음이 많은 청년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술과 안주가 나오는 시간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고 준비된 질문을 소화하려면 서둘러야 했기에 지난 결승전 이야기로 그의 아픈 기억부터 재생시켰다.
“
“3세트 때 내가 좀 유리하다고 생각했는데 업그레이드 타이밍을 놓치고 나니까 불리해지더라고요. 아차한 순간에 벌어진 일이라 안타까운 마음에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럼 프로리그에서 질 때도 결승전 때랑 비슷한 기분이 드나요?”
“일단 어떤 경기든 간에 지는 순간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요. 내가 왜 그랬을까 란 자책감만 들죠. 부스 밖으로 나갈 용기도 나지 않고요.”
그래서일까, 그는 경기 후 남자의 눈물이 더 애처롭다는 걸 보여주듯 많은 눈물로 주위를 안타깝게 만들었고 동료 선수들과 가족들은 그의 들썩이는 어깨를 부여잡기에 바빴다. 경기 후 각종 사이트에도 ‘괴수의 눈물’ 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뜰 정도로 그의 패배순간의 모습은 한동안 화제가 됐었다.
사실 그가 결승에 오르는 데는 축하무대를 장식한 원더걸스의 영향이 컸다.
“결승 전 이후
“그 날은 정신이 없어서 못했고 나중에 성준이 형한테 문자가 왔었는데 맛있는 거 사준다고 하더라고요.”
한 때 같은 유니폼을 입고 같은 목표를 향해 뛰던 선수들이지만 오늘의 동료가 내일의 적이 되는 것이 익숙한 그들에게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프로의 세계이기도 했다.
“다음 리그에서
“만나고 싶죠. 어떤 경기가 되더라도 꼭 만나고 싶어요.”
괴수의 눈물 동영상과 더불어 화제가 된 동영상이 있었는데 그와
“촬영하면서 재미있는 에피소드 같은 거 없었어요?”
“그 CF 속에 나오는 아이가 온게임넷 관계자분의 아들인데 제가 계속 NG를 내니까 화가 났던지 나중에 제 얼굴에 낙서를 하고 가더라고요.”
아이의 멋진 복수극을 재미있게 듣고 있는 가운데 주문한 술과 안주가 나왔다. 소주 한 잔에 서먹함이 사라지고 두 잔에 말을 트며 세 잔에 진솔한 얘기가 나오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의 잔에 술을 따랐다.
2. 두 잔 – 엿보기
뒤이어 서비스 안주로 계란말이가 나왔지만 그가 먹는 안주는 오로지 화채뿐이었다.
“술 마시면서 쓰다 쓰다 하니까 어떤 사람이 그러더라고요. 쓰다면서 왜 술을 마시냐고. 그렇게 물으니까 딱히 대답할 말이 없더라고요.”
쓴 술의 가치를 대신 말해주길 바라며 던진 이야기였지만 역시 그는 미소로만 답할 뿐이다.
“그날 부모님이 경기를 관람했는데 기분이 어땠어요? 특별히 당부한 말은 없었어요?”
“준우승도 잘한 거니까 괜찮다고 하시면서 다음에 더 잘하면 된다고 위로해 주셨어요.”
부모님께 우승 트로피를 안겨드리고 싶은 마음이 없을 리 만무했지만 그는 꽤 담담하게 말한다.
“게임 캐스터들이 대부분
“부담 보다는 저를 인정해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어요.”
술과 안주를 시킬 때 그의 분신과도 같은 콜라도 함께 시켰지만 경기를 앞둔 상태가 아니라선지 그날은 콜라 지존다운 면모를 보여주지 않았다. 궁금해 물었더니 술을 마실 때는 굳이 없어도 된다는 아주 간단한 이유를 댄다.
“몸에 좋지 않은 콜라 대신 다른 음료로 바꿀 생각은 없어요? 징크스 때문에 못 바꾸나?”
“그 징크스는 이미 깨졌어요. 그거랑 상관없이 맛있어서 계속 먹는 거예요.”
콜라 얘기를 꺼내다 보니 그의 특이한 장래희망이 떠올랐다. 한가로운 대낮의 슈퍼아저씨의 모습은 어린 시절 그의 뇌리를 스치며 장래희망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아직도 슈퍼마켓 주인이 되는 게 꿈이에요?”
“네. 나중에 나이가 어느 정도 들면 해보고 싶어요.”
“그럼 은퇴 후의 진로는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일단 군대를 가야겠죠. 그 후엔 취직을 하고 취직 후에는 결혼을 할 것 같아요.”
잘 나가는 프로게이머의 진로는 평범함 그 자체였다. 보태고 더하고 꾸밀 것 없는 미래설계였다.
“미래의 신부는 어떤 스타일이었으면 좋겠어요?”
“다른 건 상관없는데 착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이상형이 착한 사람이에요?”
“착하고 목소리가 예쁜 사람이요.”
예쁜 목소리의 기준을 묻자,
“제가 들었을 때 좋은 목소리요.”
라고 애매하게 대답한다. 결국 알아낸 예쁜 목소리의 주인공은 탤런트 윤정희 였다.
“혹시 팬들 중에 이상형에 가까웠던 사람은 없었어요?”
“팬들은 다 예쁜 것 같아요. 외모도 예쁘고 마음도 예쁘고 응원하는 모습도 예쁘고.”
특종다운 특종을 잡고 싶은 기자의 마음으로 접근했지만 그는 정석대로 움직이듯 바른 말만 하는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그의 본 모습이기도 했다.
3. 세 잔 – GG 선언
술을 마시기 시작한지 대략 1시간 정도가 지났지만 그는 흐트러짐 하나 없는 말짱한 얼굴로 인터뷰에 응하고 있었다.
“술 정말 잘 마시네요. 취중진담이 도저히 안될 것 같은데.”
본래의 목적을 상실해버린 인터뷰는 그저 술을 잘 마시는 선수와의 인터뷰로 변질돼 있었다. 그러나 의무와 사명감을 져버릴 수 없기에 꿋꿋하게 질문을 이어 나갔다.
“목표를 위해 열심히 달려왔는데 허무한 느낌 같은 건 들지 않아요?”
“준비한 걸 다 보여주지 못하고 경기가 끝난 거에 대해선 아무래도 그렇죠. 할 수만 있으면 경기를 다시 하고 싶었어요.”
“다시 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요?”
“장담은 못하지만 적어도 허무하게 지지는 않을 것 같아요.”
“사람들에게 얼굴이 많이 알려진 후 변화된 것이 있다면요?”
“친구들한테도 연락이 많이 오고 팬들도 알아봐 주시니까 행동에 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프로게이머란 직업에 대해 회의를 느껴본 적은 있어요?”
“인터넷을 하다 보면 좀 느끼는 것 같아요. 자기가 좋아하는 선수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걸 비하하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그럼 프로게이머로서의 삶의 힘든 부분이 있다면요?”
“개인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 정도요. 다른 부분에 있어선 특별히 힘든 건 없어요.”
사람들은 왜 쓴 술을 저리도 마실까 하지만 적당히 알코올의 기운을 느낄 정도로 즐기게 되면 마음의 자물쇠는 비집고 들어갈 공간을 마련해 준다. 그리고 아픔과 슬픔 또는 행복을 공유하며 슬픔을 반으로 줄이고 기쁨을 배로 만드는 위대한 마술을 보여준다.
그는 마지막 질문까지 단답형으로 말하며 인터뷰 작성에 대한 고민을 증폭시켰고 탁자 위에 쌓인 술병과 반비례하는 또렷한 얼굴로 졸고 있는 나를 걱정했다. 그런 그에게 난 GG를 선언했고 물량토스, 콜라토스, 슈퍼토스 등 그에게 붙는 수많은 수식어들 가운데 ‘소주토스’ 라는 새로운 별명 하나가 생각난 걸로써 그와의 인터뷰를 만족해야 했다.
잘했어 재욱아~
꽤 오랜 시간 인터뷰를 했지만 그에 관한 궁금증은 덜 풀린 상태였고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딱 그만큼의 틈만 친해진 느낌이었다.
“인터뷰 컨셉을 정말 잘못 잡았어요. 취중진담 실패야 실패.”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그에게 심경을 토로했지만 또 씩 웃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이젠 그의 쑥스러움을 담아내는 미소가 익숙해진 듯 전처럼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팬들이 사랑하는 괴수의 모습에는 저 미소가 포함되어 있을 거란 확신마저 들었다.
“지금 본인에게 가장 필요한 건 뭐라고 생각해요?”
“여유……인 것 같아요.”
이제 막 게이머로서의 한 고비를 넘긴 그에게 적당한 질문이라 생각했고 돌아온 답은 짧지만 강한 여운을 남긴다. 그가 말한 여유가 경기에 임하는 자세를 말하는 건지 삶의 여유를 말하는 건지 아니면 둘 다 포함된 내용을 얘기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더 이상 그에게 질문을 하진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별다른 대화 없이 온 길을 되돌아 갔다.
그가 지나가는 길을 함께 걷는 사람들은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 냥 힐끔거렸고 그는 그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골목길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쉬니까 어때요? 기분이 좀 나아졌어요?”
“네. 이젠 괜찮아요.”
어때요란 질문에 괜찮아요란 뻔한 답이 나온다는 걸 예상했지만 어쩌면 그에게 그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훌훌 털고 일어나 넘어진 곳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길 바랬다. 나는 마지막으로 멀쑥한 걸음의 저 아이에게 “잘했어 재욱아” 라고 웅얼대듯 마음 속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는 전보다 한층 성숙된 모습으로 잡음이 가득한 명동 거리를 아무 일 없었던 듯 걸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