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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1 박용욱코치를 만나다 Ⅱ - 악마토스와 한강

2008.07.15

2편- 악마토스와 한강
 
  그를 다시 만난 건 르까프 전을 막 끝낸 다음이었다. 3:0이란 완승을 거둔 T1의 승리소식은 반가웠지만 몸이 무거워지는 월요일 한낮부터 찾아오려니 여간 미안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깍듯한 대접은 불편함과 부담으로 가득 찼던 마음을 금새 소멸시켜 버렸다.
  인터뷰 장소로 우리가 선택한 건 도심의 열기를 식혀줄 한강. 전부터 탁 트인 곳에서 인터뷰를 하고 싶었지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았다던 그는 익숙하게 차를 몰기 시작하더니 숨쉴 곳을 향한 엑셀을 밟았다. 덩달아 나의 목적인 악마토스의 스토리도 시작되었다.

 “이 차 처음 사러 갔을 때 어땠는지 아세요? 어떤 방법으로 사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을 때라 현금을 통째로 들고 갔었어요. 행여 잃어버리기라도 할까 봐 안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넣어갔는데 그땐 정말 세상 물정을 너무 몰랐던 것 같아요.”

  세상살이 노하우가 없었던 그가 차를 사려고 한 건 부모님을 위해 뭔가를 해드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그는 어느새 투자 가치가 있는 주식 얘기와 거침없이 올라가는 집값 문제를 걱정하는 나이가 되었다. 그의 순수했던 시절의 추억인 소나타는 부모님을 거쳐 그에게 다시 돌아왔고 대신 그의 부모는 더 좋은 차를 아들에게 선물 받게 된다. PC방을 전전하며 프로게이머가 되겠다고 속을 썩였던 장남은 그새 철이 들어 지난날 부모의 멍든 맘을 그렇게 보상해주고 있었다.
  평일 오후의 한강은 한산하고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한강의 기적을 믿듯 낚시 줄을 드리우고 낮잠을 청하는 강태공들과 무료한 직장생활의 고민을 털어놓기 위해 찾아온 넥타이 부대들이 한강의 주 손님이었다. 우리 역시 그들처럼 한강을 앞에 두고 진솔한 대화의 장이 되기를 바라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늘 반복되는 일상인데 가끔 어디론가 떠나고 싶단 생각 들지 않아요?”

 “부모님 두분 다 공무원이신데 생활 패턴이 항상 똑같으셨어요. 그런 모습을 보며 자랐기 때문인지 몰라도 부모님과는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었어요. 프로게이머가 된 것도 그런 이유들 중 하나예요. 어느 날 사촌 형 집에 놀러 갔는데 형이  < “넌 베스트 오브 베스트가 되고 싶지 않냐?” > 이렇게 묻더라고요. 그 질문에 제가 뭐라고 답한 줄 아세요?”

< “난 무난하게 살다가 죽을래요.” >
 “이랬어요. 전 반복되고 따분한 걸 싫어해요. 최근에 먹었던 음식을 먹지 않는 것처럼 모든지 변화를 주는 편이죠. 아 근데 질문이 뭐였죠?”

이야기가 중심을 잃고 삼천포로 빠지기 직전 그는 다시 평정을 찾으며 질문을 확인했다.

 “아 맞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지 않냐는 질문이었죠? 당연히 떠나고 싶죠. 근데 전 주변 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쉽게 나서지 않아요. 되도록이면 계획성 있게 움직이려 해요.”

  성격이 정반대인 최연성 코치가 같은 질문에 어떤 식으로 답할까 생각해보니 둘의 스타일이 확실히 달라 보였다. 이렇듯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움직이는 그의 스타일은 과거시절 악마토스의 플레이에 녹아 들었고 그것은 현재 T1팀 코치로서의 역할에 무게를 실어주는 듯 했다.
  나는 평범한 질문에 비범한 답이 나오길 바라는 염치없는 생각으로 질문들을 계속 이어갔다.

 “어린 시절 얘기 좀 해주세요.”

 “어린 시절이요? 음......뭐가 있을까……아, 언젠가 한번 동생이 맞고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바로 문을 박차고 나가서 <”누가 내 동생 건드렸어?”>하면서 형 노릇을 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그 아이를 혼내줬어요?”

 “그게 그 친구 얘기를 들어보니 동생이랑 서로 오해한 부분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흐지부지 넘어갔어요.”

  싱거운 스토리 전개에 본인조차 민망한지 겸연쩍게 웃는다. 기대한 만큼 뒷심이 받쳐주는 추억담은 아니었지만 어린 시절 형제애를 되새겨 볼만한 값어치는 충분히 있었다.

 “아무튼 멋진 형이네요. 지금도 동생한테 잘해줘요?”

 “사실 어렸을 때 동생을 많이 때렸는데 그 때 생각하면 미안하잖아요. 그래서 지금은 더 잘해주려고 해요.”

  철 없던 시절, 동생과 사생결투를 벌인 시간이 많아서 그런지 그는 과거를 사죄하듯 좋은 형이 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학창시절은 어땠어요?”

 “그때부터 게임을 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게임과 관련된 일들이 많죠. 대회 나가서 상금 같은 걸 타면 친구들 밥도 사주고 부모님께 돈도 드리고 그러면서 지냈어요. 어느 날은 어머니가 잔소리를 하시길래 홧김에 돈을 돌려달라고 한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돈을 드렸을 때 이미 다 쓰신 상태더라고요.”

  우린 마치 짜기라도 한 듯 같은 타이밍에 웃었다. 부모님 얘기로 웃게 될 거란 사실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진지함 속에 숨겨져 있던 웃음 포인트라 더 반갑게 느껴지는 듯 했다. 그리고 그가 들려주는 스토리는 별다른 양념 없이도 맛있게 간이 밴 김치찌개처럼 개운하고 칼칼한 맛을 냈다.

 “도재욱 선수는 콜라를 먹어야 경기가 잘 풀린다는 징크스가 있잖아요. 박코치님도 혹시 징크스 같은 게 있나요?”

 “전 선수시절에 녹차 마시면서 경기를 했었어요. 요즘 재욱이 콜라 사주면서 스탭들이 이런 마음으로 나에게 녹차를 사다 줬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도재욱 선수의 경기에는 콜라보다도 강한 안정제인 그가 늘 함께한다. 스타리그 4강전이 있었던 날도 그는 도재욱 선수보다 더 큰 긴장감을 갖고 경기를 지켜봤다. 그리고 짜릿한 역전승으로 경기가 끝나자 이름을 재차 불러도 못들을 정도로 그는 멍해 있었다. 그날 각종 기사에는 그가 감격적인 눈물을 흘렸다고 일제히 보도했고 그 눈물은 행복한 단맛이었다.

 “재욱이는 단점이 많은 친구예요. 그런데 경기를 이겨나갈 때마다 그 단점들을 고쳐나가더라고요. 조금씩 발전하는 게 눈에 보였는데 이만큼 예상했다면 저만큼 앞서간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기대치 보다 훨씬 좋은 성과를 거두는 것 같아요.”

  생애 처음으로 개인리그 결승전을 치르게 된 도재욱 선수와 그의 눈부신 성장을 곁에서 지켜보며 선수시절과는 또 다른 뿌듯함을 느끼는 박용욱 코치. 역전의 묘미보다 과거 본인의 경기에서 느꼈던 희열과 짜릿함을 재현한 상황이 그에겐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다.

 “지금까지 한 경기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다면요?”

 “이 질문은 자주 받았는데 인터뷰 할 때마다 대답이 달랐어요. 지금은 특별히 기억나는 경기가 없네요. 가장 진실된 대답은 이유가 없는 것 아닐까요?”

  그간 수많은 인터뷰를 통해 받은 반복적 질문들은 그를 지루하게 만들 법도 했지만 그 때마다 그는 다른 대답으로 기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그의 말은 그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한 이미지용 멘트가 아닌 순간순간 떠오르는 진실들이었다.

 “이건 최코치님께도 드린 질문인데 선수와 코치, 어느 모습이 본인에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

 “이 질문보다 게임에 대한 미련이 있는지 뭐 그런 식의 질문으로 수정하면 어떨까요?”

 “그게 편하시면 그 질문으로 대답해 주세요.”

  준비해온 질문까지 바꾸며 인터뷰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모습에서 그의 섬세하고 꼼꼼한 성격이 돋보였다.

“게임에 대한 미련 물론 남아있죠. 하지만 코치 일에 더 집중하고 싶어서 없애려고 많이 노력해요. 얼마 전에 예능프로를 봤는데 강호동이 몇 십 년 만에 샅바 잡는 모습이 나오더라고요. 그거 보면서 공감 많이 했는데 미련을 갖지 말고 일해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들었어요.”

  17년 만에 샅바를 잡은 강호동과 긴 선수생활을 끝내고 막 코치 길로 들어선 그는 어쩌면 같은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최선을 다하고 싶고 지고 싶지 않았다던 강호동의 말은 그래서 그를 더욱 자극시켰다.

  선택보다 과정을 즐길 줄 아는 나이 스물 여섯, 그리고 과정보다는 선택한 삶에 책임을 져야 할 때인 서른 살 이후를 그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스물 다섯이 됐을 때 위기가 한차례 있었어요. 나이에 대한 딜레마에 빠져서 고생도 많이 했죠. 또래에 비해서 많이 늦잖아요. 그런데 스물 여섯이 돼서 진로결정을 하니까 그런 걱정은 없어지더라고요. 지금은 발전여부에만 신경이 쓰여요. 서른 살 이후는 지금보다 더 즐겁고 재미있는 활력 넘치는 삶을 살고 싶어요. 그때 되면 결혼도 했겠죠 아마……아침에 출근할 때 부인이 넥타이를 매주는 그런 모습이 보기 좋은 것 같아요.”

 “결혼을 하고 싶다고 해서 드리는 질문인데 그럼 박코치님을 좋아하는 여성 분들이 박코치님께 대시할 수 있는 조건은 뭘까요?”
 “조건이라기 보단 전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좋아요.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좋은 것 같아요.”

 “거기에 예쁘기까지 하면 더 좋은 거죠?”

“그거야 그렇죠. 근데 그건 여자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나의 질문은 그의 날카로운 대답에 묻혀 본래의 공격성을 잃고 힘없이 추락했다. 탈출구는 오직 화제를 돌리는 것뿐이었다.

“지금 가장 큰 고민이 있다면 뭐예요?”

 “코치로서의 고민과 인생의 고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요. 코치 일을 시작하면서 생각했던 건 팀의 정상화였어요. 지금은 팀원들이 너무 잘해줘서 제 위치에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을 까봐 걱정이죠. 개인적인 고민은 아무래도 군대 문제겠죠.”

“인생에서 이건 정말 안타깝게 놓쳤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어요?”

 “사랑이 아닐까 해요. 인생 자체는 일과 사랑으로 나눌 수 있잖아요. 어느 정도는 일 때문에 사랑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사랑을 포기한 것과 포기하지 않은 것은 각각 장단점이 있는데 둘 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인터뷰 시간만큼 그 앞에 쌓인 담배 꽁초도 늘어갔고 그는 담배 연기의 피해를 줄여주기 위해 자리를 옮겨 앉았다.

 “담배 정말 많이 태우시네요.”
 “그래도 여자친구 생기면 바로 끊어요. 그러다 헤어지면 다시 피고……”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그냥 여자친구 있으면 담배 피기가 싫어지더라고요.”

  그가 담배를 태우는 모습을 보지 않는 순간은 아마도 핑크 빛 러브가 시작됐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그땐 그를 둘러싼 적지 않은 외로움은 잠시 사라져있을 것이다.
시계는 우리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시간을 여지없이 가리켰고 인터뷰 역시 그 끝이 보였다.

 “식상한 질문이긴 하지만 다시 태어나도 프로게이머를 할 것 같아요?”
 “아뇨. 전 다른 일을 해보고 싶어요. 가령 체격조건이 좋다면 육사 쪽을 지원해서 멋있는 군인이 되고 싶기도 하고 의사나 금융 관련 업종도 좋을 것 같아요. 엔터테인먼트 회사 같은 걸 차려서 직접 운영해 보는 것도 적성에 맞고 괜찮을 것 같아요.”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랑의 추억이 있다면?”

 “글쎄요……근데 전 여자친구한테 사랑한다고 말해본 적이요. 사랑한다 란 말보다 사랑했었습니다 라고 표현하는 게 더 진실한 거라고 생각해요.

 “광안리 행까지 얼마 남지 않았는데 프로리그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어요.”

 “지금처럼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한다면 우승이라는 건 자연적으로 따라올 것 같아요. 결승은 노력해야 가는 거지만 결승전에서 우승과 준우승은 하늘이 결정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코치가 아닌 인간 박용욱으로서 희망하는 삶이 있어요?”

 “만족과 발전이 적절하게 이루어지는 삶을 살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선수들에게 한마디 해주세요.”

 “우리 팀이든 다른 팀이든 누구에게 강요를 받아서 하는 프로게이머는 없다고 생각해요. 일단 자기가 선택한 삶에 대해서 후회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나중에 세월이 흘러 생각해봤을 때 만족을 느꼈으면 해요. 그리고 더 나은 경기를 위해 준비하면서 항상 신중하게 행동하는 선수들이 됐으면 좋겠어요.”

  마지막 질문까지 마친 후 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는 2시간 가량 이어졌던 긴 인터뷰를 무사히 마쳤다. 그래도 한강보단 자동차의 시원한 에어컨의 실효성을 느끼며 우리는 그의 애마로 오던 길을 향해 다시 달렸다. 그리고 차 안에서 가장 원초적인 질문을 그에게 던졌다.

 “스타를 잘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다른 거 없고 꾸준히 연습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에요.”
 “예습복습 하듯이 말이죠?”
 “네. 연습만 열심히 하면 누구든 잘할 수 있는 게 스타예요.”
  사적인 질문까지 모두 소화해낸 그는 할아버지나 먹는 거라며 장난치듯 얘기한 은단을 몇 알 입 속에 넣고는 여유롭게 강남거리를 달렸다. 늘 새로운 변화와 트랜드를 쫓듯 복잡한 도시 강남은 출발하기 전과 다를 것 없이 바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모두가 1인자의 목표를 향해 달리지만 결과는 오직 한 명을 택하는 냉정하고 치열한 곳, 한 명이 환호하면 나머지 한 명은 고개를 떨궈야 하는 높낮이가 분명한 그곳에 땀을 비 오듯 흘리며 1,2 세트를 마친 후배와 후배를 다독이지만 자신의 경기처럼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악마토스 선배인 그가 있다.

 “잘해.”
 “꼭 이길게요.”

  선배와 후배는 짧고 간단한 형식적 인사만 하고 각자의 자리로 출발한다. 그리고 곧 경기는 시작된다. 한 사람은 부스 안에서 다른 한 사람은 대기실에 앉아 각자 이유 있는 땀을 흘리며 4강전을 마쳤다. 이제는 부스 밖에서 선수를 지켜보는 모습이 더 익숙한 박용욱 코치, 그는 적어도 그곳에 있어야 함을 분명히 말해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