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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FORCE 126호]'만나고 싶었습니다.' 박용욱-최연성의 ‘우리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8.02.27

작성[2008-02-26 14:58]



선수에서 코치로 변신한 SK텔레콤의 별들
2008년 1월23일 발표된 SK텔레콤 코칭스태프 전원 경질은 잠잠하던 e스포츠계를 들쑤신 일대 사건이었다. e스포츠 팬들은 전대미문의 강력한 조치에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를 계기로 SK텔레콤에서 활약하던 두 명의 선수가 플레잉 코치로 변신했다는 사실에 더욱 주목했다. 임요환의 공군 입대 후 1년간 팀의 주장을 맡아왔던 박용욱과 최연성이 코칭스태프로 자리를 옮겼다는 소식은 그들의 경기를 사랑했던 팬들에게 큰 아쉬움을 남겼다. 더욱이 이들은 설 연휴를 맞아 각자의 팬카페를 통해 선수 은퇴 의사를 밝히며 코치직에 전념할 것을 다짐했다. 분명히 쉽지는 않았을 일생일대의 결정을 내리고 제2의 e스포츠 인생을 시작한 그들을 만났다. 글/사진 박송이 기자 raki@fighterforum.com

코치라고 불러주세요
아직은 그들의 이름 뒤에 코치라는 직함을 붙이는 것이 어쩐지 어색하다. 그들의 데뷔를, 또 전성기를 지켜봐 왔기 때문일까. SK텔레콤의 숙소에서 만난 그들은 아직도 그저 선수인것만 같아서 서로 ‘박코치’, ‘최코치’ 하는 호칭이 낯설기만 했다.

“사실 서로 부르고 듣는 저희도 아직 익숙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어색하다고 해서 계속 선수시절처럼 호칭을 쓴다면 코치라는 직책에 익숙해지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조금 낯간지럽고 쑥스럽더라도 계속 그렇게 부르고 있어요.”

6층과 7층에 각각 자리를 잡고 선수들의 연습을 지켜보는 그들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다. 선수들의 상태를 체크하고 근황을 묻거나 연습경기의 성적을 파악하는 모습도 어색하지 않다. 그들을 대하는 선수들 역시 마찬가지로 자연스럽다. 바로 얼마 전까지 같이 연습하던 동료이자 형이다.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 오히려 놀랍다.

“저희나 선수들이나 지금은 쓸데없이 어색해하고 있을 때가 아니니까요. 2007 시즌 성적에 대해서는 모두 반성하고 있고, 2008 시즌에는 절대로 달라진 모습을 보이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 변화를 위해서 힘을 합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 선수들에게는 팀 동료가 코칭스태프가 됐다고 해서 그것을 어색해하거나 신경쓰거나 할 겨를이 없습니다. 실제로 저희가 코치직을 수행하고 있는 데 어색함을 느끼는 선수는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선수 시절에도 지금도 박용욱과 최연성이 SK텔레콤 T1의 구성원이라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았으니까요.”

떠날 때는 미련없이!
이들은 설 연휴 기간에 각자의 팬카페와 언론 매체 등을 통해 선수를 은퇴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초 플레잉 코치로 임명됐던 것과 달리 선수 생활을 청산하고 선수 지도자로 거듭나겠다는 것. 이들의 갑작스런 은퇴 발표에 각종 스타크래프트 커뮤니티와 팬카페 등이 떠들썩해졌다. 이들의 선수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팬들은 ‘너무 아쉽다’, ‘아직도 충분히 계속 할 수 있는데 왜 벌써 그만두려 하느냐’, ‘다시 한번 고려해 볼 수 없느냐’는 등의 반응을 보이며 큰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러나 박용욱과 최연성은 자신들의 의사 결정에 흔들림이 없었다.

“저는 선수생활에 미련 없어요. 프로게이머로서 해 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봤거든요. MSL 우승, 스타리그 우승, 프로리그 우승도 해봤고, 신인상도, MVP도 모두 받아봤습니다. 그만큼 그 순간에는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쏟아 부었고, 그 대가로 이루게 된 일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프로게이머라는 틀에 더는 쏟아 넣을 것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회사 측에서 플레잉 코치직을 제안했을 때 마음을 결정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죠.”

선수생활에 미련이 없느냐는 질문에 최연성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미 충분히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해 온 흔적이 역력한 말투다. 그는 특유의 소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음에 아쉬운 구석이 없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런 최연성을 조금은 부러운 듯 바라보는 박용욱은 “미련이 없다기보다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말로 운을 뗐다.

“경험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독이 될 때도 있는 것 같아요. 아무것도 모를 때는 그냥 밀어붙일 수 있는 일도 실패했던 경험이 있는 일이라면 멈칫거리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요. 저는 열 여덟살 때 게임을 시작해서 열 아홉살까지 활동하다 1년 6개월 가량을 쉬었습니다. 대학엔 가야 할 것 같았거든요. 대학을 다니다 스물 한 살이 돼서 다시 게임을 시작했을 땐 별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다시 시작하면 얼마든지 금세 기량을 회복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현실은 제 생각과 크게 달랐어요. 너무 힘들었던 거에요.”

박용욱은 결국 1년 6개월의 공백을 극복하고 우승을 차지했지만 그 공백을 극복하기까지의 과정이 너무나 힘겨웠음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 힘겨웠던 경험이 어깨 부상 치료로 인해 1년을 쉬어야 하는 지금 공백에 대한 두려움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제가 다시 한번 그 공백을 극복해 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더라고요. 병원에 들러 진단을 받고 무리하면 안 된다는 의사 선생님의 당부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졌어요. 정말 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니까요. 저는 최코치와 달리 선수생활을 계속 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공군에 지원해볼까 하는 마음도 먹었던 적이 있고요. 제 생일 때마다 팬 여러분들이 생일파티를 열어주시는데, 그 때마다 꼭 ‘박용욱 선수 내년에는 꼭 더 좋은 모습 보여주세요’ 하고 격려해 주세요. 그런 격려를 들을 때면 선수생활을 계속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심각하고 냉정하게 생각해 봤죠. 과연 1년의 공백 후 다시 예전만큼의 기량을 회복할 수 있을까, 지금 뛰는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럴 수 있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어요. 그래서 선수로서 재기할 수 없다면 빠르게 마음을 접고 코치직에 전념하자고 생각했습니다.”

맞수, 콤비가 되다
박용욱과 최연성은 선수시절 2004년 <스프리스 MSL> 결승전에서 자웅을 겨루기도 했던 맞수다. SK텔레콤의 투 톱으로 활약하며 개인리그와 프로리그를 가리지 않고 팀 성적을 도맡았던 둘은, 팀내 동갑내기 라이벌로 서로에게 자극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제는 맞수라기보단 콤비죠. 선수 시절에는 서로 맞서기도 하고 사소한 다툼도 있었지만 이제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나란히 팀을 이끌어야 하니까요. 성격도 서로 판이하게 달라서 부딪히는 부분도 있지만 상호 보완되는 부분이 더 많습니다.”

박용욱은 최연성의 결단력을 칭찬했다. 자신은 한번 결정한 것을 밀어붙이는 추진력은 강하지만 중요한 사안을 결정할 때의 결단력이 부족한 데 비해 최연성은 판단이 빠르다는 것. 박용욱이 먼저 칭찬을 늘어놓자 최연성 역시 박용욱의 장점을 거론한다.

“아이디어맨이에요. 생각도 많고 그 생각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도 잘 하고요.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는 능력이 뛰어난 것 같아요. 그래서 도움도 많이 받죠.”
한 때 불꽃을 튀겨가며(?) 한 무대에서 싸웠던 사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다정다감한 모습이다. 4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들도 세월을 배우고 나이를 먹은 탓일 게다. 
 
그들만 아는 이야기
SK텔레콤이 코칭 스태프 전원 경질이라는 강력한 조치를 취했을 때 e스포츠 팬들의 반응은 엄청났다. 지금껏 성적 부진을 이유로 들어 감독을 경질한 사례는 있었지만 코칭 스태프를 전원 해임한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SK텔레콤이 이번 조치를 취한 이유가 단순한 2007 시즌의 성적 부진 때문은 아니라는 뜻이다.

“복합적인 문제였다고 생각해요. 성적 부진은 그 문제를 해소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였던 셈이죠. 지금 생각해보면 이미 2006년 무렵부터 문제의 여지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문제가 해소되지 않은 채 시즌을 거듭하다 보니 최악으로 치닫게 된 겁니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우리 팀은 최고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선수들이 그 실력을 리그에서 모두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하다 보니 자연스레 성적이 떨어지게 된 거죠. 이번 일은 그 복합적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회사 측이 취한 가장 강력한 조치였다고 생각합니다. 거의 마지막 강수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어요.”
제 살을 베어내는 것과 다름 없는 일이었지만 박용욱과 최연성은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을 믿는단다. 그래서 회사의 결정에 따랐고 코치직의 제안도 받아들이게 됐다는 것.

“저희는 T1의 창단부터 지금까지 계속 함께 해 왔습니다. 비록 더 이상 선수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함께 해 온 선수들과 팬들, 그리고 팀을 위해 항상 노력하고 싶습니다. 거센 폭풍이 한번 지나갔지만 그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데 힘이 될 겁니다.”

그래도 아쉬운 것들
이제 선수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코칭 스태프로서 제2의 e스포츠 인생을 시작하는 박용욱과 최연성이지만 아쉬운 일이 하나도 없을 수는 없다. 선수 생활을 마감하며 가장 아쉬운 것이 무엇인가를 물으니 둘은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이 됐다.

“저는 윤열이랑 상대전적 100전 못 채운 거랑 재윤이한테 1승도 못 따낸 것이 가장 아쉽네요. 그거 말고는 별로 아쉬운 거 없어요. 윤열이는 제가 프로게이머로 활동하면서 가장 많이 만났던 상대고, 또 제게는 많이 고마운 상대기도 하죠. 프로게이머 시절을 돌이켜 보면 아마 요환이형 다음으로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재윤이한테는 너무 많이 져서 분한 마음이 있어요. 이벤트 전에서 두 번인가 이겨봤지만 공식전에서 승리한 기록이 한 번도 없거든요.”

최연성은 이윤열과의 100전을 꼭 채우고 싶었다며 각별한 아쉬움을 표했다. 이제 100전을 채울 수는 없겠지만 마지막 은퇴전을 치를 때는 반드시 상대를 해 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윤열이가 이거(인터뷰) 볼 지는 모르겠지만, 보면 꼭 승낙해줬으면 좋겠어요. 윤열이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저는 선수생활 하는 내내 윤열이를 라이벌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아마 제 은퇴전을 치러준다면 윤열이의 선수생활에 축복이 있을 거에요.”

박용욱은 무엇보다 한결같이 자신을 응원해주던 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장 크다고 말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응원해 주셨어요. 매번 경기장에 찾아와 주시고, 제가 성적이 좋지 않을 때도 늘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팬들께 이제 선수로서 좋은 경기를 보여드릴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그 점이 가장 아쉽습니다. 또 죄송하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이제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 다른 방법을 찾았으니 앞으로도 계속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새해, 새출발
2008년은 박용욱과 최연성에게 모두 기억에 남는 해로 기록될 것이다. 스물 여섯이라는, 새파랗다면 새파랗다 할 수 있는 젊은 나이에 이미 성공을 경험하고 또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게 된 해이기 때문이다. 새해와 함께 새출발하는 그들의 마음가짐을 들어봤다.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새해를 맞으며 코칭 스태프라는 새 직무를 맡게 돼 더 느낌이 남다른 것 같아요. 선수 생활 하는 동안 기쁠 때도 있었고 힘들 때도 있었습니다. 아마 코치가 돼서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선수일 때와는 또 많이 다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은 SK텔레콤 T1의 2008 시즌에 모든 것을 걸고 있습니다. 제 선택에 스스로 만족할 수 있도록 반드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고 싶어요.”
박용욱의 비장한 각오를 가만히 듣던 최연성은 다시 멋적게 씨익 웃어보였다. 왜 웃느냐고 물으니 자기는 각오가 그렇게 비장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좀 태평하게 들릴 지도 모르지만 앞으로는 다 잘 될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지금 다음 시즌을 준비하고 있는 선수들의 자세도 그렇고, 방금 박코치가 비장하게 말 한 것만 봐도 그렇고요(웃음). 저는 그 뒤를 잘 보며 따라가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 선수들은 알아서 잘 할 수 있는 선수들이고 제 역할은 그 뒤를 보고 혹시 힘들어 보이는 부분이 있다면 도와주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어렵지 않게 해 나갈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말은 다르지만 내용은 하나다. 선수에서 코치가 되었지만 팀을 최고로 만들겠다는 그 의지만큼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몸담아 온 팀에 대한 한결 같은 애정과 자신의, 또한 동료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이들의 변신이 기대되는 이유다.